Copyright 2009-2013
Built with Indexhibit

이미정 개인전 《Pink Noise》展 : 분홍빛 해방

우리에게 분홍색은 통상적으로 여성성, 연약함, 소중함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분홍색은 이외에도 다양한 의미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만개한 분홍색의 벚꽃을 전장에서 죽어간 젊은 무사들로 은유해 왔으며, 불교에서는 분홍색 연꽃을 열반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인도에서는 카스트제도 바깥에 존재하는 불가촉천민인 하리잔Harijan 여성의 인권을 지키는 자경단 굴라비갱GulabiGang이 있다. 여기서 굴라비는 힌두어로 분홍색을 뜻하며 굴라비갱의 단원들은 분홍색으로 된 사리를 입고 다닌다. 굴라비갱은 분홍색을 대사회적인 인권운동을 위한 확고한 상징체계로 확장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미정의 《Pink Noise》展(2014)을 가로지르는 분홍색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분홍색의 의미가 아니라 굴라비갱의 분홍색처럼 대사회적인 영역으로 확장된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이미정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분홍색은 어떠한 사회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 이미정이 이번 《Pink Noise》展에 선보이는 작품들이 어떤 특이점을 가졌는지 살펴보자.

네 개의 L자형 나무합판으로 구성된 Open Stage(2014)는 관능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도상과 색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폭 9m에 이르는 천에 프린트된 Pink Noise(2014)의 도상은 우리에게 분홍빛으로 폭발하는 화산을 상기시킨다. 필자는 하나의 무대를 연상시키는 두 작품의 연계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의 충만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The Slogan(2014)은 붉은색 바탕의 피켓에 ‘내게! 사정! 해줘!’, ‘그래! 바로! 거기!’ 같은 선정적인 문구들이 단호한 글씨체로 적혀있다. The Slogan에서 보이는 선정적인 문구들은 우리가 포르노그래피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미정이 선별한 문구들을 담고 있는 피켓들은 개인이 자신의 관념을 사회에서 발언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이동성을 가진 도구이다. 이런 측면에서 Open Stage와 Pink Noise가 인간의 몸을 통해서 발현되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을 정적인 차원에서 시각화한 것이라면, The Slogan은 사랑의 감정이 사회관계 안에서 발언 되는 것을 동적인 차원에서 시각화한 것이다. 실제로 이미정은 자신의 작가노트에서 The Slogan이 전시장이 아닌 실제 거리에서 외쳐지는 실천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것이며, 이를 통해서 사회가 청년세대를 대상화하여 소비하는 포르노그래피적인 폭력성에 저항하는 태도를 강하게 드러내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필자는 이미정의 이러한 태도가 그녀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들을 가로지르는 분홍색에 압축적으로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정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분홍색은 우리가 향유해야 할 자유로운 사랑의 감정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미정의 분홍색이 사회적 가치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분홍색이 상징하는 사랑의 감정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동물은 본능에 따라서 성생활을 하지만 인간은 사회관계라는 상징적인 층위에서 성생활을 영위한다. 이 때문에 연인이 서로의 몸을 통해서 나누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단순하게 생물학적인 생식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연인의 사랑은 그들만의 고유한 역사인 동시에 공공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이들의 사랑은―시장가치에 부합하면 무슨 짓이든지 용인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사회 안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사랑은 막장 드라마와 결혼정보업체에 박제된 상태로 존재한다.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할 사랑의 감정이 사회 속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몸과 감정의 주인으로서 살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몸과 감정을 통틀어서 청춘이라고 정의해보자.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청춘을 사회가 명령하는 기준에 등록시키기 위해서 과도하게 소진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을 사회가 명령하는 기준에 성공적으로 등록시켰다고 할지라도 청춘은 스펙을 쌓기 위한 연료로 소멸해버린다. 오늘날 대부분 젊은이는 이렇게 청춘이 누락된 생물학적인 젊음만을 거죽으로 남긴 상태로 사랑과 마주한다. 그러나 청춘을 통해서 자연스러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사랑은 하나의 소비재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이처럼 청춘을 잃고 자신의 몸과 감정의 주인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생물학적 젊은이들이 양산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과연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굴라비갱의 분홍이 대사회적인 인권운동을 위한 확장된 상징이었듯이, 이미정의 분홍도 청년세대의 억압된 청춘에 대한 비극을 발언하는 확장된 상징이다. 여기서 필자는 이미정이 대사회적 발언을 위해서 작업을 변주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개인의 삶이 공공의 가치에 의해서 간과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지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필자는 개인에 대한 이미정의 사려심이 최민화의 분홍연작과 유사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화운동이 처절하게 벌어졌던 1980년대는 산자가 죽고 죽은 자가 사는 시대였다. 이한열 열사의 장례에 쓰일 대형 부활도를 하루 만에 그려낸 것으로도 유명한 민중미술가 최민화는 80년대가 만들어낸 시대의 악몽을 밀도 있게 헤아리기 위해서 90년도부터 분홍연작을 진행했다. 최민화의 분홍은 지옥과도 같았던 80년대를 표피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금지와 폭력의 시대를 뚫고 나가기 위해서 분주하게 뛰어다녔던 개인들의 상처와 열정, 황폐함을 근원적으로 보듬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최민화의 분홍연작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간과된 개인의 삶을 재조명하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미정의 Open Stage, Pink Noise와 The Slogan으로 이어지는 의미의 궤적은 최민화의 분홍연작과 마찬가지로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감응하면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요하고 정적인 레포츠 중의 하나인 낚시를 상징하는 Wait for (2014)를 통해서 이를 더욱 확고히 보여주고 있다.

필자의 의견을 정리해 보자면, 이미정의 분홍색은 우리가 사회로부터 금지당한 몸과 감정에 대한 자주성을 다시 기억해낼 수 있는 감각의 장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Open Stage와 Pink Noise사이를 거닐며 몸의 감촉과 감정의 분출을 기억하고 제법 무거운 The Slogan피켓들을 직접 들어보기도 한다면, 우리가 망각했던 몸과 감정이 부르짖는 분홍빛 소음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분홍빛 소음들을 통해서 금지된 몸과 감정을 우리 안에서 되살려내야 한다. 자신의 몸과 감정의 주인이 된 개인은 생물학적인 나이를 떠나서 언제나 청춘일 수 있다. 그리고 청춘을 향유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소중한 공동성을 긴밀하게 순환시켜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미정의 분홍이 이러한 사회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홍태림 (작가, 독립기획자)